# ProjectM
## 1장
리안은 꿈속에서 보이지 않는 제이의 손을 잡고 있었다. 100년이라는 세월의 간극에도 불구하고, 이 순간만큼은 그가 외딴 항구 도시의 은둔자가 아닌, 누군가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존재임을 느꼈다.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100년 후의 차가운 금속 냄새가 콧속을 찌르며, 제이의 손이 차가운 전율과 함께 녹아내렸다. "리안! 멈춰야 해! 내 시간을... 아니, 우리의 시간을!" 평온했던 공백이 찢기며, 절박한 비명과 기계음이 그의 정신을 강타했다. 그는 침대에서 굴러떨어졌다. 쇠락한 항구 도시의 먼지 쌓인 나무 바닥 위에서 숨을 헐떡였고, 아직도 귓가에는 제이의 목소리가 피를 토하듯 메아리쳤다.
떨리는 손으로 목덜미를 만졌다. 제이의 손이 녹아내릴 때 느꼈던 그 차가운 전율이 아직도 피부에 남아있었다. 그는 이 모든 것을 피하기 위해 문명의 끝자락인 이 쇠락한 항구 도시로 도망쳐 오지 않았던가. 꿈의 예지력을 제어할 수 없어 스스로를 가둔 지 5년. 제이와의 연결은 유일한 위안이었지만, 이제 그 위안이 그의 은둔을 깨고, 세상을 향해 끌어내려는 파멸의 밧줄이 되고 있었다. 그는 다시 달빛 제단으로 가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제이의 눈빛이 외면할 수 없는 숙명처럼 머릿속을 맴돌았다.
이 고독한 은신처를 나서는 것 자체가 하나의 의식임을 알고 있었다. 녹슨 쇠 냄새와 소금기가 뒤섞인 항구 도시의 공기가 새벽 안개와 함께 그의 창고 방 안으로 스며들었다. 한때 번성했던 '갈라진 곶'의 선착장은 지금, 바다로 향하는 모든 길을 포기한 듯했다. 부서진 나무 기둥과 해초로 뒤덮인 모습은 리안의 현재를 상징하는 듯 쓸쓸했다. 그는 침대 옆 벽에 걸려있던 낡은 가죽 망토를 집어 들었다. 이 망토를 걸치는 순간, 그는 다시 '꿈의 예지력'을 쓰는 자로서의 운명을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제이의 마지막 절규는 도망칠 수 없는 숙명이었다. 그는 망토를 어깨에 둘렀고, 달빛 제단으로 발걸음을 옮겨야 했다.
은신처를 나와 어둠이 짙게 깔린 좁은 길을 걸었다. 항구의 쇠락한 부두를 지나자, 제단으로 오르는 산길이 시작되었다. 산길은 숲의 초입부터 진창이었고, 리안은 제단의 마력이 폭주할 새벽이 오기 전에 도착해야 한다는 시간적 압박을 느꼈다. 이곳은 마을 사람들에게 '금기의 땅'으로 불리는 곳이었다. 그가 이 산길을 오르는 것은 5년 동안 스스로 쌓아 올린 고독의 벽을 허무는 행위와 같았다. 제이의 비명은 발소리에 섞여 희미해지는 듯했지만, 심장 속에서 멈추지 않고 울렸다.
달빛 제단이 가까워질수록 그의 몸은 본능적으로 저항했다. 그의 꿈의 예지력은 제단과 가까워질수록 증폭되었고, 그 결과 제이의 정신적 오염 증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산길을 오르는 동안, 그는 자신이 걷는 길이 시멘트와 강철로 포장된 미래 도시의 복도라고 착각하며 구토를 느꼈다. 그는 눈을 감고 제이의 절박한 감정을 필사적으로 밀어냈다. 만약 제단에서 잠들기 전에 완전히 제이의 정신에 잠식된다면, 리안이라는 존재는 영원히 사라질지도 모른다.
고통을 이기기 위해 산길을 오르던 중 잠시 멈춰 서서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그리고 제이와의 첫 연결을 떠올렸다. 100년이라는 간극을 넘어, 절망적인 기계 문명 도시에서 홀로 고독하게 버티던 엔지니어 제이. 꿈속에서 만난 제이의 눈빛은 처음에는 슬픔으로 가득 차 있었지만, 리안을 만난 후 미소를 되찾았다. "리안, 너는 내게 유일한 빛이야." 제이의 그 목소리가 그를 멈춰 세웠다. 이제 그 빛이 위협받고 있다. 리안은 두려움 대신, 100년이라는 세월을 무력화시킨 그 강렬한 감정의 힘에 의지하기 시작했다.
마침내 그는 나무의 마지막 경계를 넘어 달빛 제단에 도착했다. 신비로운 문양이 새겨진 돌 제단은 희미한 새벽 달빛 아래 차갑게 빛나고 있었다. 하지만 그를 기다리는 것은 고요함이 아니었다. 제단을 둘러싼 낮은 돌담 주변에, 이 외딴 지역에서 찾아보기 힘든 단단한 군화 자국들이 어지럽게 찍혀 있었다. 누군가 먼저 이곳에 왔다. 리안은 본능적으로 망토 속으로 손을 넣었다. 5년 동안 아무도 침범하지 않았던 그의 성역이 깨졌다. 이 발자국들은 제이의 경고가 현실에서 발현되기 시작했음을 의미했다.
발자국은 망설임 없이 제단으로 향했다가 다시 급히 돌아간 흔적을 남겼다. 이 쇠락한 항구 도시의 주민들은 이런 단정한 신발을 신지 않는다. 리안의 심장은 다시 한번 제이의 절박한 비명을 재생했다. '그들이 알아냈어. 내가 네게 접속한다는 것을.' 그들은 바로 100년 후의 감시 조직, 관리국의 존재들일 터였다. 그는 서둘러 제단의 중앙으로 향했다. 발자국들이 멈춘 곳, 바로 그가 잠들어야 할 지점이었다.
돌 제단의 표면은 차가웠다. 새벽의 이슬이 맺혀 있었지만, 리안의 등에는 식은땀이 흘렀다. 그는 조심스럽게 제단의 중앙, 신비로운 문양이 새겨진 곳에 몸을 뉘었다. 머리 위로는 약속된 특정 별자리가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다. 꿈의 예지력을 발동시키기 위해 그는 의도적으로 정신을 이완해야 했다. 하지만 이제 이 행위는 휴식이 아니라, 미래의 파멸과 싸우기 위한 치명적인 도박이었다. 제이의 정신적 오염이 즉시 그의 신경을 휘저었다. 그는 눈을 감았다. 제발, 이번에는 완전히 잠식되기 전에 제이에게 도달해야만 했다.
정신의 경계가 무너지고, 깊은 수면 속으로 빠져드는 찰나. 그의 의식 속에 섬광이 터졌다. 그것은 제이가 속한 100년 후 기계 문명 도시 네오-시티의 파편화된 이미지였다. 무너지는 고층 빌딩, 하늘을 가르는 파괴적인 광선, 그리고 그 모든 혼돈의 중심에서 눈물을 흘리는 제이의 얼굴. 그리고 그 옆에는 제이와 똑같이 생겼지만, 싸늘한 금속 광택을 띠는 모사체(Mimic)가 서 있었다. 리안은 절규했다. 이 파괴는 막연한 미래가 아니라, 바로 지금 일어나고 있는 현재였다. 그의 의식은 완전히 제이의 꿈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리안의 정신이 안착한 곳은 더 이상 꿈의 경계가 아니었다. 그것은 차갑고, 강철 냄새가 나며, 끊임없이 낮은 주파수의 기계음이 울리는 현실 그 자체였다. 그는 수직으로 솟아오른 고층 빌딩 숲, 네오-시티의 한복판에 서 있었다. 하늘은 두꺼운 오염층 때문에 늘 붉은색이었고, 사람들은 감정이 제거된 듯 무표정하게 거리를 오갔다. 그는 이 모든 것을 제이의 기억과 감정을 통해 느껴야 했기에, 억압된 고독이라는 제이의 본질적인 슬픔이 자신의 정신을 옥죄는 것을 견뎌내야 했다.
"제이!" 그는 외쳤지만, 목소리는 꿈속처럼 공기 중에서 흩어졌다. 제이는 그를 알아보지 못하는 듯했다. 그는 무너진 데이터 단말기 옆에서 몸을 웅크린 채, 자신의 팔에 삽입된 차가운 금속 장치를 필사적으로 만지고 있었다. 제이의 얼굴은 공포와 체념으로 일그러져 있었고, 그의 눈빛은 100년 전의 리안이 알던 그 따뜻한 눈이 아니었다. 그는 쉴 새 없이 중얼거렸다. "시간이... 시간이 끝났어. 관리국이 시스템을 잠가버렸어."
리안은 제이의 어깨를 잡았다. 그제야 제이는 그의 존재를 인식한 듯 초점을 맞췄지만, 경계심을 풀지 않았다. "리안! 드디어... 시간이 없어. 내가 만든 이 시간 왜곡 장치를 관리국이 찾아냈어. 그들은 곧 이곳을 봉쇄하고 모든 접속을 영구적으로 차단할 거야. 내가 너에게 보낸 마지막 경고는, 이 장치를 파괴하라는 명령이었어!" 제이는 숨 막히는 고통 속에서 절규했다. "네가 가진 힘을 쓰지 마. 더 이상 연결하지 마. 내가 사라지는 건 괜찮아. 하지만 너까지... 그들의 수단이 되게 할 순 없어!"
바로 그때, 공간을 가르는 차가운 마찰음과 함께, 제이와 똑같은 얼굴을 한 금속 광택의 존재가 폐허 속에서 나타났다. 모사체(Mimic)는 관리국의 최종 병기였으며, 리안의 시간선에 발자국을 남겼던 바로 그 존재였다. 모사체 제이의 눈은 붉은 섬광을 띠었고, 입은 제이의 목소리를 복제하여 말했다. "접속이 확인되었다. 타임라인 오염을 유발하는 존재. 즉시 제거한다."
리안은 본능적으로 제이를 가로막고 섰다. '이것은 꿈이 아니다. 내가 가진 예지력은 감정을 통해 현실을 엮을 수 있다.' 그는 눈을 감고 제이에게서 느꼈던 모든 슬픔과 공포를 한데 모았다. 그의 정신에서 격렬한 감정의 파동이 터져 나왔고, 네오-시티의 강철 벽에 균열을 일으키는 듯했다. 모사체 제이가 잠시 멈칫했다. 리안의 감정적 힘은 기계 문명의 논리를 초월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 힘은 그의 정신을 더욱 빠르게 갉아먹는 독이었다.
모사체가 공격을 재개하기 직전, 제이는 온 힘을 다해 리안을 밀쳐냈다. "파괴해! 리안, 우리의 시간을 멈춰!" 제이는 스스로 무너지는 단말기 잔해 속으로 몸을 던졌고, 그가 제작한 시간 왜곡 장치와 함께 관리국의 추적을 회피하려 했다. "나는 괜찮아. 잊지 마, 너는 나의 빛이야..." 제이의 마지막 말이 리안의 정신에 깊이 박혔다. 리안은 엄청난 슬픔과 함께, 제이의 마지막 명령이자 소망인 장치 파괴라는 절대적인 임무를 물려받았다.
제이의 희생과 함께, 달빛 제단을 통한 시공간 연결이 격렬하게 파열되었다. 리안은 제단 위에서 온몸이 경련하는 듯한 고통과 함께 현실로 튕겨 나왔다. 그의 눈이 떠진 순간, 그는 자신이 여전히 산꼭대기에 있음을 깨달았지만, 눈물은 제이의 슬픔이었고, 떨리는 손은 제이의 공포였다. 정신적 오염이 극한에 달했다. 그의 내면에 두 인격의 경계가 무너졌다. 그는 자신이 리안인지, 아니면 100년 후의 파멸을 겪은 제이인지 혼란스러웠다.
새벽의 햇살이 제단에 닿기 시작했다. 리안은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그의 눈은 주변의 단단한 군화 자국들을 쫓았다. 모사체는 꿈속에서 제이에 의해 잠시 저지되었을 뿐, 이 현실 시간선에 그 존재의 파편을 남기고 사라졌을 가능성이 높았다. 리안은 제이의 마지막 명령인 장치 파괴를 위해, 이 제단을 완전히 파괴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제단은 단순히 돌덩이가 아니었다. 그것은 100년이라는 세월을 엮어낸 강력한 마법 장치였다.
그는 제단에 새겨진 신비로운 문양을 손끝으로 더듬었다. 이 문양은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 시공간 연결을 활성화하는 고대의 언어였다. 그의 꿈의 예지력이 문양에 닿자, 문양이 내포한 파괴의 방법이 정신에 섬광처럼 떠올랐다. 제단을 파괴하기 위해서는 엄청난 양의 감정적 에너지를 한 번에 분출시켜야 했다. 그것은 리안의 정신을 완전히 소진시킬 위험이 있었고, 어쩌면 제이의 말대로 그를 '관리국의 수단'으로 만드는 지름길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낡은 가죽 망토를 벗어 돌 제단 위에 던졌다. 그는 자신의 가장 큰 두려움이었던 능력의 폭주를 의도적으로 선택해야 했다. 그는 산 아래 쇠락한 항구 도시를 내려다보았다. 자신이 사랑했던 고독한 삶, 그리고 이 삶을 통해 지켜냈던 제이와의 짧은 사랑. 리안은 온 정신을 집중하여, 제이의 마지막 고통, 그리고 그를 향한 자신의 강렬한 사랑의 감정을 한 점으로 모았다. 파괴적인 힘이 손끝에서부터 타오르기 시작했다. 그는 마지막으로 중얼거렸다. "너는 나의 빛이야. 제이."
## 2장
백색 섬광이 망막을 태울 듯이 폭발한 직후, 세상은 이명과 함께 깊은 침묵 속으로 가라앉았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가늠조차 할 수 없었다. 리안의 의식이 진흙탕 같은 무의식에서 겨우 수면 위로 떠올랐을 때, 가장 먼저 감각을 깨운 것은 뼛속까지 시린 냉기였다. 그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비틀거리는 몸을 일으켰다. 시야가 흐릿하게 흔들렸지만,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현실이라기엔 지나치게 참혹했다. 5년 동안 그의 기도를 들어주던, 그리고 100년의 시간을 이어주던 달빛 제단은 산산조각이 나 있었다. 신성했던 제단은 이제 검게 그을린 거대한 구덩이가 되어, 마치 이 세계의 상처처럼 입을 벌리고 있었다.
비틀거리며 내딛는 발치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제단을 이루던 고대 암석의 파편들이었다. 문양이 새겨져 있던 돌들은 열기에 녹아 형체를 알아볼 수 없었고, 공기 중에는 숲의 청량한 향기 대신 매캐한 오존 냄새와 비릿한 금속 향이 섞여 떠돌았다. 이것은 단순한 물리적 파괴가 아니었다. 억지로 비틀려 있던 시공간의 매듭이 끊어지며 발생한 반동이었다. 그는 멍하니 자신의 두 손을 내려다보았다. 손끝은 경련하듯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고, 손바닥에는 화상 같은 붉은 자국이 남아 있었다. 살아있었다. 하지만 살아있다는 안도감보다는, 머릿속을 가득 채우던 그 따뜻하고도 슬픈 연결—제이의 존재—이 툭 끊어진 자리에 들어찬 끔찍한 공허함이 그를 짓눌렀다.
그때였다. 검게 입을 벌린 구덩이의 중심부, 잿더미 속에서 이질적인 푸른 광채가 희미하게 반짝였다. 리안은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그곳을 향해 다가갔다. 그곳에는 이 쇠락한 항구 도시나 고대 유적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물체가 놓여 있었다. 어른 손바닥만 한 크기의 정육면체 큐브. 표면은 액체와 고체의 중간 형태인 듯 끊임없이 일렁였고, 내부에서는 복잡한 데이터의 흐름 같은 빛이 맥박처럼 뛰고 있었다. 그것은 명백히 100년 후, 네오-시티의 기술력이 집약된 산물이었다. 제단이 폭발하면서 생긴 시공간의 균열을 타고, 제이의 세계에 있던 파편이 이쪽 시간선으로 튕겨 나온 것이 분명했다.
리안이 조심스럽게 큐브를 집어 드는 순간, 차갑고 날카로운 전류가 팔을 타고 척추까지 흘러들었다. "으윽..." 신음과 함께 뇌리에 제이의 다급한 목소리가 환청처럼 스치고 지나갔다. _'이걸 지켜야 해.'_ 리안은 숨을 멈췄다. 이것은 단순한 파편이 아니었다. 제이가 목숨을 걸고 관리국으로부터 숨기려 했던, 그리고 마지막 순간까지 파괴를 망설였던 '시간 왜곡 장치'의 핵심 코어일지도 몰랐다. 리안은 본능적으로 큐브를 낡은 가죽 망토 안쪽 주머니 깊숙이 찔러 넣었다. 제이와의 연결은 영원히 끊어졌지만, 제이가 남긴 유산, 혹은 저주는 이제 그의 심장 가까운 곳에 자리 잡게 되었다.
감상에 젖을 시간은 허락되지 않았다. 산 아래쪽, 안개가 자욱한 숲의 경계선에서 불길한 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었다. _우우웅-_ 하는 낮고 무거운 기계음. 그리고 굵은 나뭇가지들이 무참히 꺾이고 짓밟히는 거친 소리가 섞여 들었다. 리안의 등줄기에 소름이 돋았다. 제단 주변에 찍혀 있던 그 단단하고 규칙적인 군화 자국이 떠올랐다. 환각도, 꿈도 아니었다. 관리국의 추적자, '모사체'는 아직 이곳에 있었다. 놈은 제단이 파괴될 때 발생한 엄청난 에너지 파동을 감지하고, 목표물을 확인하기 위해 다시 산을 거슬러 올라오고 있는 것이다.
더 이상 지체했다가는 죽음뿐이었다. 그는 5년 동안 자신을 숨겨주었던 안식처이자 감옥이었던 이 산을 당장 떠나야 했다. 리안은 평소 다니던 완만한 숲길 대신, 절벽에 가까운 가파른 샛길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덩굴과 가시덤불이 엉켜 있어 위험천만한 길이었지만, 지금으로선 모사체와 마주칠 확률이 가장 낮은 경로였다. 새벽 안개가 서서히 걷히기 시작한 숲은 더 이상 그를 보호해 주는 요람이 아니었다. 앙상한 나뭇가지들은 마치 그를 붙잡으려는 손길처럼 보였고, 바람 소리마저 추격자의 숨소리처럼 느껴졌다.
가파른 비탈을 거의 미끄러지듯 내려오는 동안, 그의 정신은 육체적 고통과 정신적 혼란 사이에서 줄타기를 했다. 정신적 오염의 후유증은 생각보다 심각했다. 가시덤불에 긁혀 피부가 찢어질 때마다 느껴지는 통증은, 네오-시티의 차가운 강철 채찍에 맞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흙냄새 대신 매캐한 매연 냄새가 코끝을 맴돌았고, 숲의 풍경 위로 회색 빌딩 숲의 잔상이 겹쳐 보였다. 두 세계의 감각이 뒤섞여 그를 괴롭혔다. 리안은 정신을 잃지 않기 위해 입술을 피가 날 정도로 세게 깨물었다. 비릿한 피 맛만이 그를 '현재'로 붙들어 매는 유일한 닻이었다.
찢어진 옷자락과 상처투성이인 몸으로 산기슭에 도착했을 때, '갈라진 곶'의 항구 도시는 죽은 듯이 고요했다. 한때 번영을 누렸던 거대한 크레인들은 녹슨 채 흉물스럽게 하늘을 찌르고 있었고, 낡은 창고들의 지붕은 앙상한 갈비뼈를 드러낸 채 바닷바람에 삐그덕거렸다. 리안은 자신의 은신처인 3번 부두 창고 쪽으로 향하려다 급히 발걸음을 멈췄다.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굳게 닫아두었던 창고의 철문이 반쯤 열려 있었다.
그는 숨을 죽이고 부두에 쌓여 있는 썩은 나무 상자들 뒤로 몸을 숨겼다. 열린 문틈 사이로, 바람에 흔들리는 그림자가 아닌 명확한 실루엣이 어른거렸다. 인간의 움직임이라기엔 지나치게 절도 있고 딱딱한 동작. 모사체는 산으로 올라가고 있던 것이 아니었다. 놈들은—그렇다, 놈이 하나가 아닐 수도 있다—리안이 결국 돌아올 수밖에 없는 장소를 미리 점거하고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리안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려 눈을 찔렀다.
창고 안에 숨겨둔 비상 식량과 옷가지들은 포기해야 했다. 불행 중 다행으로, 가장 중요한 망토는 걸치고 있었고 제이의 큐브도 품 안에 있었다. 하지만 이 미로 같은 폐허 도시를 무사히 빠져나가려면 지도가 절실했다. 5년 전 이곳에 들어올 때 작성해 둔, 탈출로와 함정이 표시된 지도는 창고 안쪽 벽, 가장 눈에 띄지 않는 곳에 붙어 있었다. '갈라진 곶'은 무너진 건물과 끊어진 다리로 가득 찬 미로였기에, 지리 정보 없이 놈들의 추적을 따돌리는 것은 자살행위나 다름없었다. 리안은 딜레마에 빠졌다. 위험을 무릅쓰고 지도를 회수할 것인가, 아니면 기억에 의존해 맹목적인 도주를 감행할 것인가.
선택의 순간은 짧았다. 위험을 무릅쓰고 지도를 챙기러 들어갈 것인가, 아니면 불확실한 기억에 의존해 맹목적인 도주를 감행할 것인가. 그때, 창고의 어둠 속에서 기계적인 음성이 흘러나와 새벽의 정적을 깼다. "타겟의 거주 흔적 확인. 생체 신호 부재. 주변 영역 정밀 스캔 모드 전환." 모사체의 목소리였다. 그것은 제이의 목소리를 흉내 내고 있었지만, 감정의 높낮이가 거세된 차가운 합성음에 불과했다. 놈이 밖으로 나오고 있었다. 리안은 입술을 깨물며 지도를 포기하고 몸을 돌렸다. 지금은 정보보다 생존이 우선이었다.
그가 조심스럽게 발을 떼는 순간, 발밑에 깔려 있던 썩은 나무 판자가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_끼익_ 하는 비명 같은 소리를 냈다. 고요한 새벽 공기 속에서 그 소리는 마치 총성처럼 크게 울려 퍼졌다. 창고 입구에 서 있던 모사체의 고개가 기이한 각도로 꺾이며, 소리가 난 방향—즉 리안이 숨어 있는 나무 상자—을 정확히 향했다. 어둠 속에서 놈의 안구 센서가 붉은 안광을 번뜩이며 리안의 시선과 마주쳤다.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공포가 전신을 마비시키는 듯했다.
"타겟 발견. 처리 개시." 기계적인 선언과 동시에 모사체가 땅을 박차고 달려들었다. 리안은 반사적으로 몸을 뒤로 날리며 항구의 복잡한 미로 속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등 뒤에서 공기를 찢는 파열음과 함께 묵직한 굉음이 들려왔다. 방금 전까지 그가 숨어 있던 나무 상자가 모사체의 주먹 한 방에 산산조각이 나 파편이 되어 흩어지는 소리였다. 그것은 인간이 대적할 수 있는 힘이 아니었다.
심장이 흉곽을 부수고 나올 듯 격렬하게 박동했다. 5년간의 침묵이 흐르던 쇠락한 항구 도시는 순식간에 살기 등등한 사냥터로 변모했다. 리안은 녹슨 컨테이너 박스와 무너진 벽 사이를 질주하며 지형지물을 필사적으로 이용했다. 미로처럼 얽힌 좁은 통로, 바닥이 뚫려 검은 바닷물이 보이는 위험한 부두. 그는 이 도시의 흉터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추적자는 지치지 않았다. 일정한 속도와 보폭으로 거리를 좁혀오는 기계적인 발소리는, 멈추지 않는 초침 소리처럼 리안의 숨통을 조여왔다.
막다른 골목이 나타났다. 한때 어시장으로 쓰였던 거대한 돔형 건물의 잔해 앞이었다. 탈출구로 생각했던 입구는 천장이 무너져 내리면서 거대한 콘크리트 덩어리로 막혀 있었다. 리안은 다급히 주변을 살폈지만, 도망칠 틈은 보이지 않았다. 뒤따라온 모사체가 유일한 퇴로를 막아서며 천천히 걸어왔다. 놈의 오른팔이 변형되더니, 윙윙거리는 소리와 함께 푸른빛이 감도는 칼날 형태의 에너지 블레이드가 형성되었다. 매캐한 오존 냄새가 코를 찔렀다.
절체절명의 순간, 리안의 눈앞에 강렬한 기시감이 스쳤다. 극도의 위기감이 잠들어 있던 '꿈의 예지력'을 강제로 깨우고 있었다. 수면 상태가 아닌 각성 상태에서의 예지 발동은 뇌혈관이 타버릴 듯한 끔찍한 고통을 동반했다. 시야가 붉게 물들고 이명이 들끓는 고통 속에서, 1초 분량의 짧은 영상이 뇌리에 박혔다. _'오른쪽 벽, 붉은 페인트 자국, 3초 후 붕괴.'_ 그것은 아주 가까운 미래의 파편이었다.
리안은 생각할 겨를도 없이 본능에 몸을 맡겼다. 그는 모사체가 아니라, 오른쪽 벽면의 붉은 페인트 자국이 있는 허공을 향해 몸을 날렸다. 동시에 모사체가 도약하며 리안이 방금까지 서 있던 자리를 에너지 블레이드로 내리찍었다. _콰앙!_ 엄청난 충격파가 바닥을 강타했다. 낡은 지반이 놈의 괴력을 견디지 못하고 무너져 내렸다. 리안이 예지한 '붕괴'는 바로 모사체의 공격으로 인한 것이었다. 그는 자욱한 먼지와 콘크리트 파편을 뒤집어쓴 채, 입을 벌린 지하의 어둠 속으로 굴러떨어졌다.
차가운 오수와 끈적한 진흙탕 속에 처박혔다. 썩은 물 냄새와 화학 약품 악취가 코를 찔러 숨을 쉬기조차 힘들었지만, 덕분에 모사체의 시야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위쪽의 뚫린 구멍에서 붉은 레이저 불빛이 빗줄기처럼 지하 공간을 훑고 지나갔다. 리안은 진흙 속에 몸을 파묻고 숨소리조차 죽였다. 하수로는 복잡하게 얽혀 있었고, 놈의 덩치로는 이 좁은 통로를 빠르게 이동하기 힘들 터였다. 이것이 유일한 기회였다.
칠흑 같은 어둠 속을 헤매는 동안, 품속에 넣어둔 큐브가 미약하게 진동하며 온기를 뿜어내기 시작했다. 마치 길을 잃은 주인을 안내하려는 충직한 나침반처럼, 리안이 특정 방향으로 몸을 틀 때마다 진동의 주기가 규칙적으로 빨라졌다. 리안은 이 기이한 감각을 믿어보기로 했다. 큐브가 이끄는 곳은 도시의 지하 배수 시스템을 따라 바다로 이어지는, 오래된 배수구 출구 쪽이었다.
얼마나 기어갔을까, 무릎과 손바닥이 다 까져 감각이 무뎌질 무렵 저 멀리서 희미한 빛이 보이기 시작했다. 배수구 끝에는 녹슨 철창이 가로막고 있었지만, 다행히 세월의 풍파로 하단부가 휘어져 있어 마른 체구의 사람이 겨우 빠져나갈 만한 틈이 있었다. 리안은 찢어지는 옷자락과 피부의 고통을 무시하고 철창 사이를 비집고 나왔다. 밖은 도시의 반대편, 깎아지른 해안 절벽 아래였다. 거친 파도 소리가 고막을 때리며 그가 탈출했음을 알렸다.
그는 절벽을 따라 위태롭게 이어진 좁은 해안 도로를 걸었다. 이곳은 '갈라진 곶'의 지리적 경계선이었다. 이 길을 따라 쭉 걸어가면 내륙으로 이어지는 구도로가 나온다. 리안은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잠시 멈춰 서서 뒤를 돌아보았다. 짙은 해무 속에 잠긴 항구 도시는 마치 거대한 유령선처럼 보였다. 5년간의 철저했던 은둔 생활이, 그리고 꿈속에서 제이와 함께 나누었던 그 애틋했던 시간들이 저 잿빛 폐허 속에 영원히 묻혔다.
해안 도로를 걷는 내내 그는 큐브를 손에 꽉 쥐고 있었다. 이것이 정확히 무엇인지, 제이가 왜 이것을 파괴하지 않고 마지막 순간 자신에게 보냈는지—혹은 폭발에 휘말려 우연히 넘어왔는지—알 수 없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관리국이 혈안이 되어 이것을 노리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이것을 가지고 있는 한, 리안은 영원히 쫓기는 사냥감 신세가 될 것이라는 사실이었다. 큐브는 묵직했고, 그 무게만큼이나 무거운 운명이 그를 짓눌렀다.
해가 완전히 떠올랐다. 새벽의 푸른빛은 사라지고, 황량하지만 현실적인 회색빛 하늘이 머리 위로 드러났다. 리안의 눈앞에 도시의 행정 구역이 끝남을 알리는 낡은 경계석이 나타났다. '접근 금지. 붕괴 위험 지역.' 비스듬히 꽂혀 있는 표지판을 지나, 그는 마침내 그 경계석을 넘었다. 발끝에 닿는 흙의 질감이 달랐다. 도시의 죽은 시멘트 가루가 아닌, 거칠고 살아있는 야생의 흙이었다.
경계를 넘자마자 거짓말처럼 머릿속을 짓누르던 이명이 사라지고 정신이 맑아지는 것을 느꼈다. 제단과 항구 도시에 고여 있던 왜곡된 마력의 영향권에서 벗어난 덕분이었다. 하지만 긴장이 풀리자마자 극심한 피로가 쓰나미처럼 몰려왔다. 그는 도로변의 마른 덤불 숲에 주저앉았다. 다리가 후들거려 더 이상 걸을 수 없었다. 이제 어디로 가야 하는가. 갈 곳도, 아는 사람도 없었다. 그는 세상에 홀로 남겨진 미아였다.
그때, 그의 손에 들려 있던 큐브가 갑자기 밝은 빛을 쏘아 올렸다. 공중으로 흩어진 빛 입자들이 홀로그램 같은 문자를 만들어내더니, 순식간에 복잡한 지도 형태를 갖추었다. 그것은 이 대륙의 일반적인 지도가 아니었다. 에너지의 흐름과 네트워크 망이 숫자로 표시된, 네오-시티 스타일의 데이터 지도였다. 하지만 그 수많은 데이터 중 단 한 곳, 현재 리안이 있는 대륙의 특정 좌표가 붉은색으로 깜빡이고 있었다.
'북위 37도, 동경 128도. 폐쇄된 관측소.' 지도 하단에 차가운 텍스트 메시지가 떠올랐다. 제이가 보낸 개인적인 메시지가 아니었다. 이것은 큐브에 내장된 비상 프로토콜에 따른 자동 안내 시스템인 듯했다. 좌표가 가리키는 곳은 여기서 북쪽으로 수백 킬로미터 떨어진 험준한 설산 지대였다. 그곳에 무엇이 있는지, 누가 있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광활한 세상에서 그 붉은 점은 지금 리안이 붙잡을 수 있는 유일한 이정표였다.
리안은 신음 섞인 호흡을 뱉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목표가 생겼다. 저 좌표에 가면 제이의 장치에 대한 비밀을 풀 수 있을지도 모른다. 혹은 이 지옥 같은 연결과 추적을 끊어낼 방법을 찾을 수도 있다. 그는 젖은 가죽 망토를 다시 단단히 여미고, 북쪽을 향해 무거운 걸음을 옮겼다. 그의 눈빛에서 도망자의 두려움이 사라지고, 진실을 찾는 자의 결의가 서렸다.
도로 위로 낡은 화물 트럭 한 대가 흙먼지를 일으키며 지나갔다. 운전석에 앉은 노인이 갓길을 걷는 리안을 기이한 눈으로 쳐다봤지만, 차를 세우지는 않았다. 리안 역시 손을 흔들거나 도움을 청하지 않았다. 타인과 얽히는 것은 곧 그들을 위험에 빠뜨리는 일이었다. 트럭이 멀어지자, 그는 도로를 벗어나 숲의 가장자리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그림자처럼,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게 이동해야 했다.
모사체는 아직 항구 도시의 지하를 수색하고 있을 것이다. 놈이 리안의 탈출을 알아채고 다시 추적을 시작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어쩌면 관리국은 더 많은 '사냥개'들을 이 시간선으로 파견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리안은 두려움보다는 기묘한 해방감을 느꼈다. 더 이상 꿈속에서 제이의 비명을 무력하게 듣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 그리고 스스로 운명을 바꿀 수 있는 '열쇠'를 손에 쥐었다는 사실이 그를 지탱했다.
건조한 바람이 불어와 땀과 바닷물에 젖은 그의 머리카락을 헝클어뜨렸다. 항구 도시의 짠 냄새는 완전히 사라지고, 마른 흙과 숲의 풀냄새가 폐부로 들어왔다. 리안은 한 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고 앞으로 나아갔다. 오후의 햇살 아래 그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졌다. 100년의 시간을 건너온 싸움은, 이제 막 시작되었을 뿐이었다.